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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안신학교로 갔다. 내 아내가 안신학교에 교원으로 있으면서 교실 한 칸을 얻어 가지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다른 부인들 틈에 섞여서 잠깐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는 내 친구들과 함께 내가 저녁을 먹게 하려고 음식을 차리러 간 것이었다. 퍽 수척한 것이 눈에 띄었다.
 며칠 후에 읍내 이인배의 집에서 나를 위하여 위로연을 배설하고 기생을 불러 가무를 시켰다. 잔치 중도에 나는 어머니께 불려 가서,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을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냐?" 하시는 걱정을 들었다. 나를 연회석에서 불러 낸 것은 아내가 어머니께 고발한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내 아내와는 전에는 충돌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내가 옥에 간 후로 서울로, 시골로 고생하고 다니시는 동안에 고부(姑婦)가 일심동체가 되어서 한 번도 뜻 아니 맞은 일이 없었다고 아내가 말하였다. 아내는 서울서 책 매는 공장에도 다녔고 어떤 서양 부인 선교사가 학비를 줄 테니 공부를 하라는 것도 어머니와 화경이가 고생이 될까 보아서 아니했노라고, 내외간에 말다툼이 있을 때면 번번이 그 말을 내세웠다. 우리 내외간에 다툼이 생기면 어머니는 반드시 아내의 편이 되셔서 나를 책망하셨다.
 경험에 의하면 고부간에 무슨 귓속말이 있으면 반드시 내게 불리하였다. 내가 아내의 말을 반대하거나 조금이라도 아내에게 불쾌한 빛을 보이면 으례 어머니의 호령이 내렸다.
 "네가 옥에 있는 동안에 그렇게 절을 지키고 고생한 아내를 박대해서는 안 된다. 네 동지들의 아내들 중에 별별 일이 다 있었지마는 네 처만은 참 절행이 갸륵하다. 그래서는 못 쓴다."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안 일에 하나도 내 마음대로 해본 일이 없었고 내외 싸움에 한 번도 이겨 본 일이 없었다. 내가 옥에서 나와서 또 한 가지 기뻤던 것은 준영 삼촌이 내 가족에 대하여 극진히 하신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아내와 화경이를 데리고 내 옥바라지하러 서울로 가시는 길에 해주 본향에 들르셨을 적에 준영 삼촌은 어머니께, 젊은 며느리를 데리고 어떻게 사고무친한 타향에 가느냐고, 당신이 집을 하나 마련하고 형수님과 조카 며느리 고생을 아니 시킬 테니 서울 갈 생각은 말고 본향에 계시라고 굳이 만류하시는 것을 어머니는 며느리는 옥과 같은 사람이라 어디를 가도 걱정이 없다 하여 뿌리치고 서울로 가셨다는 것이었다.
 또 어머니와 아내가 서울서 내려와서 종산 우종서 목사에게 의탁하여 있을 때에는 준영 삼촌이 등짐 나르는 소를 끌어 양식을 실어다 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렇게 준영 삼촌의 일을 고맙게 말씀하시고 나서, "네 삼촌님이 네게 대한 정분이 전과 달라 매우 애절하시다. 네가 나온 줄만 알면 보러 오실 것이다. 편지나 하여라." 하셨다.
 어머니는 또 내 장모도 전 같지 않아서 나를 소중하게 아니, 거기도 출옥하였다는 기별을 하라고 하셨다. 내가 서대문 감옥에 있을 때에 장모가 여러 번 면회를 와 주셨다.
 나는 곧이라도 준영 숙부를 찾아가 뵈옵고 싶었으나 아직 가출옥 중이라 어디를 가려면 일일이 헌병대의 허가를 얻어야 하는데 왜놈에게 고개 숙이고 청하기가 싫어서 만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는 정초에 세배 겸 준영 숙부를 찾을 작정이었다.
 그 후 내 거주 제한이 해제되어서 김용진군의 부탁으로 며칠 타작간검을 다녀왔더니 준영 숙부가 다녀가셨다. 점잖은 조카를 보러오는 길이라 하여 남의 말을 빌어 타고 오셨는데 이틀이 지나도 내가 아니 돌아오기 때문에 섭섭하게 돌아가셨다는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정초가 되었다. 나는 찾을 어른들을 찾고, 어머니를 찾아 세배 오는 손님들 접대도 끝이 나서 초닷샛날은 해주로 가서 준영 숙부님을 뵈옵고 오래간만에 성묘도 하리라고 벼르고 있던 차에 바로 초나흗날 저녁때에 제종제 태운이가 준영 숙부께서 별세하셨다는 기별을 가지고 왔다. 참으로 경악하였다. 다시는 준영 숙부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게 되었다. 아버지 4형제 중에 아들이라고는 나 하나뿐, 준영 숙부는 딸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오직 하나인 조카 나를 못 보고 떠나시는 숙부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백영 백부는 관수, 태수 두 아들이 있었으나 다 조졸하여 없고 딸 둘도 시집간 지 얼마 아니하여 죽어서 자손이 없고 필영, 준영 두 숙부는 각각 딸 하나씩이 있을 뿐이었다.
 날이 새는 대로 나는 태운과 함께 해주로 달려가서 준영 숙부의 장례를 주장하여 텃골 고개 동녘 기슭에 산소를 모셨다. 그리고는 돌아가신 준영 숙부의 가사 처리를 대강하고 선친 묘소에 손수 심은 잣나무를 점검하고 거기를 떠난 뒤로는 이내 다시 본향을 찾지 못하였다. 당숙모와 재종조가 생존하시다 하나 뵈올 길이 망연하다.
 나는 아내가 보고 있는 안신학교 일을 좀 거들어 주었으나 소위 전과자인 나로서, 그뿐 아니라 시국이 변하여서 나같은 사람이 전과같이 당당하게 교육 사업에 종사할 수도, 더구나 신민회와 같은 정치 운동을 다시 계속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애국자이던 사람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문을 닫고 숨을 길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왜놈은 우리 민족의 청소년을 우리 지도자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백방으로 막아 놓고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서 농촌 사업이나 해보려고 마음을 먹고 김홍량 일문의 농장 중에 소작인의 풍기가 괴악한 동산평 농장의 농감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동산평이란 데는 수백년 궁장으로, 감관들이 협잡을 하고 농민을 타락시켜서 집집이 도박이요, 사람사람이 모두 속임질과 음해로 일을 삼아서 할 수 없이 가난하고 괴악하게 된 부락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수토가 좋지 못하여 토질 구덩이로 소문이 났었다.
 김씨네는 내가 이런 데로 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여 경치도 수토도 좋은 다른 농장으로 가라고 권하였다. 그들은 내가 한문 야학으로 벗을 삼아 은거하는 생활을 하려는 것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집하여 동산평으로 왔다.
 나는 도박하는 자, 학령 아동이 있고도 학교에 안 보내는 자의 소작을 불허하고 그 대신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자에게 상등답 이 두락을 주는 법을 내었다. 이리하여 학부형이 아니고는 땅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랫 동안 이 농장 마름으로 있으면서 소작인을 착취하고 도박을 시키던 노형극군 형제의 과분한 소작지를 회수하여서 근면하고도 땅이 부족한 사람에게 분배하였다. 이 때문에 나는 노형극에게 팔을 물리고 집에 불을 놓는다는 위협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치 아니하고 마침내 이들 형제에게 항복 받아서 다시는 성군작당하여 남을 음해하는 일을 아니하기로 맹세를 시켰다.
 이곳은 본래 학교가 없던 데라 나는 곧 학교를 세우고 교원을 연빙하였다. 처음에는 20명 가량의 아동으로 시작하였으나 이 농장 작인의 자녀가 다 입학하게 되니 제법 학교가 커져서 교원 한 사람으로는 부족하여 나 자신도 시간을 내어서 도왔다.
 장덕준은 재령에서, 지일청은 나와 같은 지방에서 나와 비슷한 농촌 개발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내 운동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서 동산평에는 도박이 없어지고 이듬해 추수 때에는 작인의 집에 볏섬이 들어가 쌓였다고 작인의 아내들이 기뻐하였다. 지금까지는 노름빚과 술값으로 타작 마당에서 일년 소출을 몽땅 빚장이에게 빼앗기고 농민은 키만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농촌 중에도 가장 괴악한 동산평을 이 모양으로 그만하면 쓰겠다 할 정도의 농촌을 만들어 보려 하였다. 그러나 기미년 3월에 일어난 만세 소리에 나는 이 사업에서 손을 떼고 고국을 떠나게 되었다. 떠날 날을 하루 앞두고 나는 작인들을 동원하여 만세 부르는 운동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이 가래질을 하고 있었다. 내 동정을 살피러 왔던 왜 헌병도 이것을 보고는 안심하고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그 이튿날 나는 사리원으로 가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신의주에서 재목상이라 하여 무사히 통과하고 안동현에서는 좁쌀 사러 왔다고 칭하였다.
 안동현에서 이레를 묵고 영국 국적인 이륭양행 배를 타고 동지 15명이 나흘 만에 무사히 상해 포동 마두에 도착하였다. 안동현을 떠날 때에는 아직도 얼음덩어리가 첩첩이 쌓인 것을 보았는데 황포강가에 벌써 녹음이 우거졌다. 공승서리 15호에서 첫날밤을 잤다.
 이때에 상해에 모인 인물 중에 내가 전부터 잘 아는 이는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네 사람이었고 그 밖에 일본, 아령, 구미 등지에서 이번 일로 모인 인사와 본래부터 와 있는 이가 5백여 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튿날 나는 벌써부터 가족을 데리고 상해에 와 있는 김보연 집을 찾아서 거기서 숙식을 하게 되었다. 김군은 내가 장연에서 교육사업을 총감하는 일을 할 때에 나를 성심으로 사랑하던 청년이다. 김 군의 지도로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등 옛동지를 만났다.
 임시정부의 조직에 관하여서는 후일 국사에 자세히 오를 것이니 약하거니와 나는 위원의 한 사람으로 뽑혔었다. 얼마 후에 안창호 동지가 미주로부터 와서 내무총장으로 국무총리를 대리하게 되고, 총장들이 아직 모이지 아니하였으므로 차장제를 채용하였다. 나는 안 내무총장에게 임시정부 문 파수를 보게 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다. 도산은 처음에는 내 뜻을 의아하게 여기는 모양이었으나 내가 이 청원을 한 동기를 말하자 쾌락하였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에 순사 시험 과목을 어디서 보고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하여 혼자 답안을 보았으나 합격이 못된 일이 있었다. 나는 실력이 없는 허명을 탐하기를 두려워할 뿐더러, 감옥에서 소제를 할 때에 내가 하나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 번 우리 정부의 정청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 줍소서 하였단 말을 도산 동지에게 한 것이었다.
 안 내무청장은 내 청원을 국무회의에 제출한 결과 돌연 내게 경무국장의 사령을 주었다. 다른 총장들은 아직 취임하기 전이라 윤현지, 이춘숙, 신익회 등 새파란 젊은 차장들이 총장의 직무를 대행할 때라 나이 많은 선배로 문 파수를 보게 하면 드나들기에 거북하니 경무국장으로 하자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사될 자격도 못 되는 사람이 경무국장이 당하냐고 반대하였으나 도산은, "만일 백범이 사퇴하면 젊은 사람들 밑에 있기를 싫어하는 것같이 오해될 염려가 있으니 그대로 행공하라."고 강권하기로 나는 부득이 취임하여 시무하였다.
 대한민국 2년에 아내가 인을 데리고 상해로 오고 4년에 어머니께서 또 오시니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 해에 신이 났다.
 나의 국모 복수사건이, 24년 만에 이제야 왜의 귀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왔다. 내가 본국을 떠난 뒤에야 형사들도 안심하고 김구가 김창수라는 것을 왜 경찰에 말한 것이었다. 아아, 눈물나는 민족의식이여! 왜의 정탐 노릇은 하여도 속에는 애국심과 동포애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 정신이 족히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독립 민족의 행복을 누리게 할 것을 아니 믿고 어이하랴.
 민국 15년에 내가 내무총장이 되었다.
 그 안에 아내는 신을 낳은 뒤에 낙상으로 인하여 폐렴이 되어서 몇 해를 고생하다가 상해 보륭의원의 진찰로 서양인이 시설한 격리 병원인 홍구폐병원에 입원하기로 되어 보륭의원에서 한 작별이 아주 영결이 되어 민국 6년 1월 1일에 세상을 떠나매 법계 숭산로의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내 본의는 독립운동 기간 중에는 혼상을 물론하고 성대한 의식을 쓰는 것을 불가하게 알아서 아내의 장례를 극히 검소하게 할 생각이었으나 여러 동지들이, 내 아내가 나를 위하여 평생에 무쌍한 고생을 한 것이 곧 나라 일이라 하여 돈을 거두어 성대하게 장례를 지내고 묘비까지 세워 주었다. 그 중에도 유세관, 인욱군은 병원교섭과 묘지 주선에 성력을 다하여 주었다.
 아내가 입원할 무렵에는 인이도 병이 중하였으나 아내 장례 후에는 완쾌하였고 신이는 겨우 걸음발을 탈 때요, 아직 젖을 떼지 아니하였으므로 먹기는 우유를 먹었으나 잘 때에는 어머니의 빈 젖을 물었다. 그러므로 신이가 말을 배우게 된 때에도 할머니란 말을 알고 어머니란 말을 몰랐다.
 민국 8년에 어머니는 신이를 데리고 환국하시고 이듬해 9년에는 인이도 보내시라는 어머니의 명으로 인이도 내 곁을 떠나서 본국으로 갔다. 나는 외로운 몸으로 상해에 남아 있었다.
 민국 9년 11월에 나는 국무령으로 선거되었다. 국무령은 임시정부의 최고 수령이다.
 나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을 보고, 아무리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국가라 하더라도 나같이 미미한 사람이 한 나라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의 위신에 관계된다 하여 고사하였으나 강권에 못 이기어 부득이 취임하였다.
 나는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으로 내각을 조직한 후에 헌법 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독재적인 국무령제를 고쳐서 평등인 위원제로 하고 지금은 나 자신도 국무위원의 하나로 일하고 있다.
 내 육십 평생을 돌아보니 상리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고는 귀함이 없을 것이건마는, 나는 귀역궁 불귀역궁(貴亦窮 不貴亦窮)으로 평상을 귀한 신분이 되어도 가난하게 지내고 귀한 신분이 아니어도 역시 가난하게 지내었다. 우리 나라가 독립하는 날에는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거니와 지금의 나는 넓고 넓은 지구면에 한 치 땅, 한 칸 집도 가진 것이 없다. 나는 과거에는 궁을 면하고 영화를 얻으려고 몽상도 하고 버둥거려보기도 하였다. 옛날 한유는 '송궁문(送窮文)'을 지었으나 나는 차라리 '우궁문'을 짓고 싶다.
 자식들에게 대하여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니 너희들이 나를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를 원치 아니한다. 너희들은 사회의 윤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 되어 사회를 아비로 여겨 효도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붓을 놓기 전에 두어 가지 더 적을 것이 있다.
 내가 동산평 농장에 있을 때 일이다. 기미년 2월 26일이 어머니의 환갑이므로 약간 음식을 차려서 가까운 친구나 모아 간략하나마 어머니의 수연을 삼으리라 하고 내외가 상의하여 진행하던 차에 어머니께서 눈치를 채시고, 지금 이 어려운 때에 환갑 잔치가 당치 아니하니 후년에 더 넉넉하게 살게 된 때로 미루라 하시므로 중지하였더니 그 후 며칠이 못하여 나는 본국을 떠났다. 어머니께서 상해에 오신 뒤에도 마음은 먹고 있었으나 독립운동을 하노라고 날마다 수십 수백의 동포가 혹은 목숨을, 혹은 집을 잃는 참보를 듣고 앉아서 설사 힘이 있기로서니 어떻게 어머니를 위하여 수연을 차릴 경황이 있으랴. 하물며 내 생일 같은 것은 입밖에 낸 일도 없었다.
  민국 8년이었다. 하루는 나석주가 조반 전에 고기와 반찬거리를 들고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를 보고 오늘이 내 생일이라, 옷을 전당 잡혀서 생일 차릴 것을 사왔노라 하여서, 처음으로 영광스럽게 내 생일을 차려 먹은 일이 있었다. 나석주는 나라를 위하여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제 손으로 저를 쏘아 충혼이 되었다. 나는 그가 차려 준 생일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또 어머니의 화연을 못드린 것이 황송하여 평생에 다시는 내 생일을 기념치 않기로 하고 이 글에도 내 생일 날짜를 기입하지 아니한다.
 인천 소식을 듣건대 박영문은 별세하고 안호연은 생존한다 하기로선 편에 회중시계 한 개를 사 보내고 내가 김창수란 말을 하여 달라 하였으나 회보는 없었고 성태영은 길림에 와 산다 하기로 통신하였으며, 유인무는 북간도에서 누구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아들 한경은 아직도 거기 살고 있다고 한다. 나와 서대문 감옥에서 이태나 한 방에 있으며 내게 글을 배우고 또 내게 끔찍이 하여 주던 이종근은 아라사 여자를 얻어 가지고 상해에 와서 종종 만났다. 이종근은 의병장 이운룡의 종제로, 헌병 보조원을 다니다가 이운룡이 죽이려 하매 회개하고 그를 따라 의병으로 다니다가 잡혀 왔었다.
 김형진 유족의 소식은 아직도 모르고 강화 김주경 유족의 소식도 탐문하는 중이다.
 지난 일의 연월일은 어머니께 편지로 여짜와서 기입한 것이다.
 내 일생에 제일 행복은 몸이 건강한 것이다. 감옥 생활 5년에 하루도 병으로 쉰 날은 없었고 인천 감옥에서 학질로 반 일을 쉰 일이 있을 뿐이다. 병원이라고는 혹을 떼느라고 제중원에 1개월, 상해에서는 서반아감기로 20일 동안 입원하였을 뿐이다.
 기미년에 고국을 떠난 지 우금 10여 년에 중요한 일, 진기한 일도 많으나 독립 완성 전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매 아니 적기로 한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일년 넘은 대한민국 11년 5월 3일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붓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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